카테고리 없음

이탈리아군대와 유모어. 이탈리아 군대의 일화 모음

musicQ 2013. 10. 1. 15:22

1 개요

원래 일본에서 '이탈리아군 전설(イタリア軍伝説)' 등으로 떠돌아 다니던 것이 2006년 9월쯤 한국에 건너와 '이탈리아군의 전설'이나 '이탈리아군의 위력' 등의 제목으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유 머로 취급하기에는 내용이 굉장히 편파적이며, 서구 중심적인 생각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무엇보다 이를 그냥 웃고 넘기는 내용이 아닌 진지하게 믿는 사람도 간혹 등장하는 듯.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유독 인터넷 상에는 과장된 소문이나 이야기가 많다.

인터넷에서 아래 내용들로 검색해보면 이 내용들이 정실인마냥 이곳저곳 퍼날려져 있지만, 조금만 심도있게 찾아보면 아래 내용들은 거의 대부분의 내용이 구라. DC 기갑갤, 그리고 역개루 카페에서도 이 내용은 쓰레기 덩어리로 취급된다.

사실 이탈리아군의 졸전이라는 글이 2ch에서 쓰여진 의도는 제2차 세계대전 일본군의 삽질을 커버하기위해 의도적으로 폴란드 기병들의 독일군 전차를 향한 돌격이나 아래의 이탈리아군의 졸전 이야기를 퍼트리기 위해서라는 설이 존재한다. 일본군의 삽질은 이것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

일단 여기서는 원문의 내용은 그대로 살리고, 원문이 현실과 다른 점은 특별표시를 해서 따로 기록한다. 즉 하단에 표시가 없다면 원문이 현실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2 내용

2.1 기원전 510년

  • 기원전 510년 상대는 크로토네(원음은 크로또녜에 가깝다.)
    당시 이탈리아 북동부에 있던 시바리스라는 나라에서 기병대의 말을 승리의 퍼레이드를 위해서 연주를 하면 뛸 수 있게 조련했다. 그런데 중요한 싸움에서 상대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결국 대혼란 끝에 대패...

    우 선 위치부터 잘못. 크로토네와 시바리스는 이탈리아 남부에 있던 그리스 식민도시이다. 기원전 510년에 시바리스에서의 정치 분쟁으로 인해 두 도시 사이에 전쟁이 났고, 두 도시 사이에 있는 강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30만 군대를 이끌고 진격했던 시바리스가 10만도 안 되는 크로토네군에 대패하고 도시가 파괴된 것은 맞지만, 전투 자체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진 것이 없을뿐더러 저 내용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사족을 달자면, 크로토네는 피타고라스와 그 제자들이 활동하던 도시였고, 크로토네군의 승리에 피타고라스 학파 출신의 장군의 활약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2.2 이탈리아 독립전쟁

  • 1866년 6월 상대는 오스트리아
    20만의 이탈리아군은 알프레히트 대공이 인솔하는 오스트리아군 7만 5천명에게 대패

    쿠 스토자 전투를 이야기함. 그러나 이 전투에 실제로 투입된 이탈리아군은 총 12만명이었다. 이탈리아군의 졸전은 장비와 기술력의 문제도 한몫한다. 오스트리아군은 발전된 강선포로 무장하였으나, 이탈리아는 통일된지 5년밖에 안된 시점에서 구식 활강포로 무장할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이제 막 통일해서 군대 체계를 잡아가기 시작한 나라와, 이미 수백년 전부터 체계화된 오스트리아 제국 군대의 전쟁이었다.
  • 1866년 7월 리사섬 공략
    첫 번째 출전시는 해상에서 사령관의 장황한 연설만으로 종료. 두번째 출전때는 리사섬을 유람 주유하고 종료. 이후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정부와 국내여론이 들끓어 비난을 받자 페르사노 사령관의 말은 「아직 우리 함대는 전투를 할 수 없다!」

    3 번째의 출전때에야 마지못해 전투를 시작, 리사섬의 오스트리아군은 1개 연대 반의 병력에 80문의 구식포가 전부여서 이탈리아군도 승리를 낙관하고 함대 28척에서 4시간동안 예비포격을 가했지만 오스트리아 포대의 반격에 페르사노 제독은 즉각 후퇴(…). 최종적으로 이탈리아군은 군함 32척을 동원하고 병력 26,000명을 상륙시키고나서 리사섬을 간신히 점령.
  • 1866년 7월 리사 해전
    상대인 오스트리아 함대의 함포는 모두 시대에 뒤떨어진 전장식. 이탈리아 함대는 함포의 성능, 장갑함의 수, 함대의 총 숫자와 배수량에서도 상대를 압도했지만 역시 시대에 뒤떨어진 충각 전술에 의해 대패.
    개 전 직후 사령장관 페르사노 제독은 최신예 장갑함「레디탈리아」에서 바로 며칠전 간신히 함대에 편입해 훈련이 부족한「아폰다토레」로 갈아탐. 이 결과 단종진을 이루던 함열이 일시정지되고 선두함은 그대로 전진...함열은 분리되었고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 함대의 테게트호프 제독은 횡진으로 목조함까지 포함해 전력 돌격.
    오스트리아 함대는 목조함까지 싸웠지만 이탈리아의 다른 함대는 방관. 최종적으로 오스트리아측의 침몰은 0, 사망자는 178명. 그나마 대부분의 오스트리아 해군 사상자는 장갑함을 따라 충각돌격을 실시한 목조함에서 발생했다. 이탈리아측의 침몰은 3척, 사망자 약 800명.
    함 대의 양과 질, 모든 스펙에서 오스트리아를 웃돈 이탈리아 함대는 구시대 전술에 대참패. 참고로 충각 전술이 유효하게 기능한 것은 이 해전이 최후. 게다가「장갑함을 가라앉히려면 충각돌격이 제일!!」이라는 잘못된 전훈을 40년간 세계에 각인시킴. 상대인 테게트호프 제독은 오스트리아 제국에선 알아주는 명장으로, 이탈리아 해군의 옆구리를 기습하여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철갑선항 목에 나오듯이, 당시의 유탄포는 목선을 무력화시키는데는 충분한 수준이었지만 아직 철갑선의 장갑을 완전히 관통할만한 수준은 되지 않았다. 리사 해전 이전에 벌어진 미국 남북전쟁에서 이 점은 분명하게 드러났으며, 이후 계속해서 유탄포가 발달하기는 했지만 철갑을 관통하는 강력한 화포를 장착한 현대적인 군함의 등장 이전까지는 철갑선간의 전투에서 충각돌격은 유효한 수단 중 하나였다.

2.3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 1895년, 에티오피아 아도와 전투
    기관총까지 장비했지만 에티오피아군에게 압도적 대패. 이 직전에 벌어진 안바·아라기 전투에서도 이탈리아군이 참패한 것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음. 즉,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상대로 2연패...orz.
    최종적으로는 에티오피아군을 상대로 6000명 가까운 사망자를 낸 대패였음.

    사 실 아도와 전투는 원래 에티오피아군이 이탈리아군보다 4배나 많았다. 이탈리아군 2만명에 비해 초창기에 동원된 에디오피아군은 무려 8만명. 게다가 당시 에티오피아는 현대식 소총과 구식 소총 등의 화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탈리아군은 숫적으로 불리했지만 에티오피아군에 상당한 피해를 줬으며 에티오피아는 8천명이 부상당하고 5천명이 전사했다. 이 부분은 또한 원작자의 무식함과 서구우월주의 의식이 강하게 내포된 부분.
  • 1896년 3월 에티오피아 정규군과의 전투.
    에티오피아군 전사자 1000여명에 대해 이탈리아군은 5000명. 근대에 들어 백인이 유색 인종에게 진 전쟁은 러일전쟁이 최초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것이 처음.

    다 시 말하지만 에티오피아는 숫자도 더 많았으며, 이탈리아는 부족한 병력과 장비, 적대적인 주민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에티오피아군은 총 10만명 중 8만명이 소총으로 무장했고, 소수의 대포와 기관총을 동원. 이탈리아군은 2만명 정도의 병력에 60여문의 대포로 무장. 게다가 이거보다도 더 먼저 1879년에 영국군은 헨리-마티니 후장식 소총과 다량의 화포, 그당시 최신예 병기인 로켓포로 무장하고 있었음에도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줄루족 에게 탈탈 털리고 다수의 소총과 2문의 대포까지 노획당했다. 게다가 워낙 순식간에 밀려 장교가 56명이나 죽임을 당하는 수치를 당했다. 다만 이 전투가 종결된 후 영국군의 패잔병 일부와 임시로 군용병원으로 쓰던 오두막 경비병 소수가 며칠동안 압도적으로 우세한 숫자와 총기를 보유한 줄루족을 상대로 방어전투를 해서 성공함으로서 간신히 체면치례를 했다.

2.4 제1차 세계대전

  • 1917년 10~11월 카포레토 회전
    오스트리아군과 사이에서 벌어진 카포레토 회전에서 이탈리아군은 대패해 3주간 150 km를 패주. 오스트리아군의 사상자 2만 3천에 대해 이탈리아군은 사망자 1만, 부상자 2만, 포로 29만 3천, 탈주자 30만.
  • 1918년 10~11월 사이.
    오스트리아와의 휴전 교섭중 이탈리아군은 이 틈을 노려 피아브강을 넘어 공세로 나왔지만 오스트리아군에게 격퇴.

    피 아브 강 전투는 수개월 전인 6월에 있었던 전투다. 또한 피아브 강 전투는 이탈리아군의 공세가 아닌 수세로, 오히러 공격을 가한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했으며, 이는 제국 붕괴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된 사건이다.
  • 1918년 11월 4일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역시 제1차 세계대전)
    휴전 발효 후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해 30만의 포로를 획득.

    두말할 것 없는 개소리. 이탈리아군의 공세는 10월 24일 시작되어 11월 3일에 끝났고, 휴전협정으로 11월 4일부터 전투행위가 종결됨. 참고로 휴전협정은 공세 5일뒤인 10월 29일부터 개시되었다.

2.5 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 1922년 에티오피아 침공
    항 공기와 전차까지 동원한 압도적인 침공전에도 불구하고 전투 초기에는 패배를 당해 전군이 포위되거나 전선이 붕괴되었다. 그때마다 이탈리아군을 구한것은 바로 독가스...orz 이탈리아군은 핀치로 몰릴때마다 독가스로 형세를 역전시켰고 이후 독가스 살포에 뒤잇는 독가스 살포로 어떻게든 억지로 승리.
    참고로 에티오피아군의 장비는 오직 소총만으로 심지어 구식 머스킷도 현역(…) 기병은 창(…)이 무장이었다고 함. 또한 공무원을 급히 모아 편성한 군대에게조차 이탈리아군은 질뻔한 것이다!

    그 러나 이미 30여년전 전에도 에티오피아군은 8만명을 소총으로 무장시켰던 근대화된 국가였다. 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에티오피아는 70만명의 병력을 소집했는데, 이는 에티오피아의 국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병력이었다. 이전에도 프랑스, 영국으로부터 다량의 소총과 기관총을 꾸준히 사들이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과도한 징집으로 무기가 모자르자 어쩔 수 없이 머스킷이나 창, 활까지 사용한 병력이 있었던 것 뿐. 또한 이탈리아군이 입은 피해는 에리트레아 출신 식민지 병사들이 대부분이었고, 다른 전선에서 에티오피아군은 녹아내리는 수준의 피해를 입었다.

    다만 유럽식 무기만 갖춘다고 유럽인들의 전투력을 갖추게 되는 것은 아니며, 인도나 중국 등에서는 유럽식 무기로 무장한 전근대적인 군대가 유럽의 근대적으로 훈련받은 군대에게 일방적으로 개발살났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에티오피아군이 어느정도 근대적인 군사적 역량을 갖추고 있었는지가 문제인데, 이는 논란이 조금 있다.

  • 1935년 10월 에티오피아 전쟁
    당 초는 에티오피아군의 후퇴 전술도 있어 순조롭게 진격했지만 수도 아디스 아바바로부터 진군한 에티오피아군에 포위되어 덴베그이나 고개를 지키는 검은 셔츠 부대는 대부분의 야포와 전차를 버리고 패주, 마칼레의 보급기지까지 떠밀려 이탈리아군의 우익은 완패, 좌익의 보급기지까지 위협당해 총사령관인 바드리오 장군은 전멸의 공포에 휩싸였다. 하지만 여기서 이탈리아군은 독가스를 사용해 형세를 역전시키고 이후 전투종료까지 독가스를 계속 사용했다.

    실제로 이탈리아군이 사용한 것은 독가스가 아닌 최루가스이다.

2.6 스페인 내전

  • 1937년 3월 스페인 과달라하라 전투
    마드리드를 목표로 한 이탈리아군 4개 사단이 진군했지만 과달라하라 전투에서 다수의 투항자를 내고 패주.

    그러나 이탈리아군이 상대한 공화파는 소련제 T-26 전차로 상당히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이탈리아군은 CV-33 소형전차(tankette)로 무장하고 있었으니 상대가 될리가(…). 즉 문제가 있는건 (언제나 그렇듯이)현장에서 싸운 군인들이 아니라 탱켓 따위를 이탈리아의 산악 지형에 적합한 전차 운운하며 선택한 군 상층부이다.

    이탈리아군은 3월18일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지만, 역으로 37mm 대전차포를 활용하여 오히러 공화파의 T-26 전차를 관광태웠다. 그리고 3월~5월동안은 소련이 150여대의 전차와 40여대의 장갑차를 지원.

    그 리고 무엇보다 과달라하라 전투 자체가 과달라하라에 주둔하고 있던 제11 국제 여단을 상대로 이탈리아군과 모로코 출신 식민지병으로 구성 된 국가군이 공세를 퍼붙다가 국제 여단의 치열한 항전으로 인해 좌초 된 것을 지원온 공화국 정규군 제4군단이 역공을 가해 국가군이 대패한 전투인데, 여기서 전투 초기 무장이나 숫자로나 완벽하게 우세였던 이탈리아군의 공세를 막은 제11 국제 여단의 주축은 같은 이탈리아인으로 구성된 주세페 가리발디 대대였다. 스페인 내전 내내 가리발디 대대는 미국 출신 에이브러햄 링컨 대대, 독일 출신 에른스트 탈만 대대, 영국 대대와 같이 국제 여단 내에서도 가장 치열하게 싸운 부대 중 하나로 명망이 높았다.


    보다 자세한 설명은 길 잃은 어린양의 글을 읽어보자.#

2.7 제2차 세계대전

  • 1940년 6월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이탈리아는 영국프랑스에 선전포고한다. 하지만 단지 히틀러의 전과를 질투한 무솔리니가 즉흥적(…)으로, 그야말로 무계획적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전쟁에 필요한 물자의 비축도 거의 없었고 이탈리아 선적의 상선도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상황이었기에 선전포고 2개월 내 외양에 나가있던 상선 대부분이 영국해군에 나포되어 버린다. 또 어떤 작전계획도 명확히 계획하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선전포고해놓고도 10일간 어떠한 군사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 1940년 6월 남프랑스 전역
    독일군에게 유린되어 항복직전인 프랑스에 침공한 이탈리아군은 불과 2개 사단도 안 되는 프랑스군의 반격을 받고 붕괴직전까지 몰렸다. 프랑스의 항복이 좀 더 늦었다면 이 프랑스군 부대는 이탈리아령을 침공(...)할 계획이었음.
  • 1940년 10월 그리스 침공
    이탈리아는 21개 사단을 동원해 그리스를 침공했지만 그리스군 13개 사단의 반격에 알바니아까지 후퇴해 붕괴직전까지 몰린다. 그리스는 친 독일적인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 사건으로 연합국측에 가담.
  • 1940년 12월 이집트 전역
    영 국령 이집트를 침공한 이탈리아군 7개 사단은 영국군 2개 사단의 반격을 받고 패주. 13만명이 포로가 되고 이탈리아령인 키레나이카까지 잃는다. 이탈리아가 무계획적으로 저지른 발칸과 북아프리카의 실정을 구원하기위해 독일은 발칸을 제압했고 아프리카 군단을 편성해 파견한다.
    하지만 이 발칸 제압을 위해 바르바롯사 작전 발동은 1개월이나 늦어졌고 북아프리카 전선에도 7,000대의 트럭이 보내졌는데(당시 동부전선 전체에서 1만4000대 밖에 없었음) 이것이 동부전선의 초기진격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된다.
  • 1940년 10월 타란토 공습
    영국해군 지중해 함대의 항모 일러스트리어스에서 발진한 소드피쉬 21기가 타란토항의 이탈리아 주력함대를 공격. 전함 콩테 디 카보우르는 대파착저, 전함 리토리오, 카이오.듀일리오 중파. 영국해군의 손해는 소드피쉬 2기.
  • 1941년 3월 마타판 해전
    마타판에서 이탈리아와 영국 수상함대가 격돌. 이탈리아 해군은 중순 3척을 상실했지만 영국해군의 손해는 전무.
  • 1942년 북아프리카, 튀니지
    25만의 이탈리아군 병력은 영국군 3만 5천과 전투, 튀니지에서 항복했다.

    그 런데 이 시기는 북아프리카 전투의 절정이며 최종단계다. 그 유명한 롬멜이 방어전을 펼치다가 폰 아르님이 북아프리카군 사령관으로 교체되었고, 독일군은 티거까지 동원하였지만 결국 졌다. 이 시기는 영국군뿐만 아니라 미군과도 같이 싸운 전투였는데, 25만 vs 3만5천이란 숫자는 어디에서 튀어나온걸까? 또한 독일-이탈리아 연합군의 포로는 약 27만여명.

    북아프리카 전투 초기 오코너 장군의 영국군 3만이 22만명 가량의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38000명의 이탈리아군 포로를 잡았는데, 이 사실이 잘못 알려진걸지도...

  • 1942년 12월 동부전선
    돈 강변에서 이탈리아 제8군은 소련군의 공격을 받자 바로 모든 병기를 포기하고 패주했다. 바로 전달인 11월에 거의 비슷한 소련군의 공격을 받았던, 훨씬 장비가 열악했던 루마니아군은 며칠간을 선전하며 전선을 유지했다.
    그리고 독일 제6군은... 무솔리니의 사위였던 치아노 이탈리아 외상[1]이 자국군을 걱정하며 괴링에게 "이탈리아군의 피해상황은 심각합니까?"고 묻자 괴링 왈..."전혀 없습니다..왜냐...그들은 소련군 포화가 시작되자 바로 후방으로 뜀박질했기 때문이지요.."라고 했다.

    그 러나 이 시기의 이탈리아군의 장비가 루마니아군보다 약간 좋았을뿐.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큰 피해를 입자 울며 겨자먹기로 이탈리아군을 추가로 증원받은 상황이었다. 참고로 1년전인 1941년에 무솔리니가 이탈리아군을 추가파병하겠다고 하자 히틀러는 수송수단이나 화력의 문제로 거부한 적이 있다.
  • 1943년 9월 무솔리니 실각
    1943년 9월 12일 오후 2시, 오토 스코르체니 중령이 지휘하는 무장 SS, 공군 혼성공수부대는 글라이더 12기에 나눠타고 바돌리오 장군의 신 정부에 의해 무솔리니가 감금된 그란 삿소 산장 근처 야산 분지의 평지에 강행착륙했다(착륙성공 8기).
    이 산장을 경비하던 부대는 적이 무장 SS란 것을 알자마자 주저없이 항복, 스코르체니 부대는 무솔리니를 무사히 구출해 단거리 이착륙이 가능한 피젤러 슈토리히 연락기로 무솔리니와 지휘관 스코르체니 중령이 먼저 탈출했다. 그리고 남은 SS대원들은 유유히 케이블카로 하산했다.(…)

    당 시 산장을 경비하던 부대는 군 소속이 아니라 무장 경찰 소속이어서 애시당초 소총 정도의 빈약한 무장을 하고 있었으며, 적이 SS라는 것을 알고 주저없이 항복한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독일군을 향해 총격을 가하는 등 저항을 하였지만, 스코르체니가 데려온 친무솔리니파 이탈리아군 장성이 "국왕의 어명으로 무솔리니가 다시 권좌에 복귀한다!" 라고 거짓 호통을 친 것에 속아 저항을 멈춘 것이다.

2.8 현대전

  • 1991년 걸프전
    이탈리아 공군의 토네이도 전폭기 20여기가 출격, 첫 실전 공중급유에 이탈리아 공군의 토네이도는 절반이 실패하고 기지로 바로 귀환. 나머지 10여기는 이라크군 군사시설을 공격했지만 그중 몇 기가 격추되어 조종사는 포로가 되었다.

    하 지만 공중급유는 실제로 매우 어려운 임무이고(한국 공군은 공중급유기가 없어서 훈련조차 하지 못한 탓에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 공중급유를 받아가며 배달오는 전투기들은 모두 미 공군 조종사가 조종해서 오는 실정이다…), 또 이탈리아 공군이 운용한 토네이도는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초저공 침투 지상공격이 주임무인 기체다. 당연히 위험도가 높은 임무를 맡는만큼 피해가 많을 수밖에. 굳이 이탈리아 공군까지 갈 것 없이 영국 공군도 걸프전에서 다수의 토네이도를 상실했다.

2.9 이탈리아군의 일화

아래의 일화들은 실화가 아닌 유머의 성격이 강한 내용들이다. 개중에 일부 실화인 것도 있긴 하다.

  • 참호속에서의 이탈리아군.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의 롬멜 원수가 이탈리아군의 참호를 방문했다. 그때 영국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이탈리아군의 병사와 장교는 모두 "오 성모 마리아님!"이라고 외치며 지면에 엎드렸다.(...)
    이 광경을 지켜본 롬멜 원수는 이탈리아군 장교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도를 멈추고 반격명령을 내리시오. 귀관이 할 말은 그것뿐입니다."
  • 이탈리아군 포로의 취급
    북 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 장교에게 무장한 이탈리아군 중대가 항복하기 위해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리품을 수집하기 바쁜 영국 장교는 그들을 무시한채 "시끄럽다!, 저쪽으로 꺼져!" 라고 이탈리아 병사의 총을 빼앗아 던지면서 고함쳤다. 이탈리아군 무장중대(...)는 어쩔 수 없이 포로로 잡아주는 영국군을 찾기위해 다시 총을 주워 또 터벅터벅 걸어갔다.
  • 고문을 받은 이탈리아군
    이 탈리아인의 '약함'은 처세술의 하나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중, 유고슬라비아 유격대의 포로가 된 독일군은 끝까지 완고하게 소속부대의 정보를 일체 발설하지 않았고 고문에도 굴하는 일 없이 꼿꼿해 세르비아인의 분노를 샀지만 이탈리아군은 곧바로 울며 용서를 빌었으므로 고문이 멈추었다고 한다.
  • 이탈리아인은 지역마다 강약이 다른가?
    제1차 세계대전시까지는 각 지방에서 징병한 장병들을 각 부대에 균등하게 배치했지만 1차대전 후에는 지역별 편성으로 군제가 바뀌었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의 약함에 지역차이는 없었다.
  • 우리가 졸리면 저쪽도 졸리다
    이탈리아군은 밤이 되면 "우리가 졸리면 상대방도 졸리다. 그러니까 공격해오지 않을 것이다."라며(…) 경계도 세우지 않고 취침했다. 그 결과 수많은 기습을 허용했다.
  • 국가나 민족이라는 의식이 희박한 이탈리아군
    병사가 한밤중에 눈을 떴는데 소대장이 어디론가 나가려는 중이었다. 병사는 소대장에게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그러자 소대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국가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지 않는다. 나는 노예가 아니기 때문에! (짐을 싸면서 소대장은 매력적인 미소를 보이며) 내가 목숨을 걸 때는 반한 여자를 지킬 때뿐이다!"[2]
    그리고 웃는 얼굴로 전선을 이탈했다. 그러자 병사도
    "소대장님! 기다려 주십시오!"
    뒤돌아본 소대장에게 병사는 이렇게 말했다.
    "저도 함께 갑니다!"(…)
    이렇게 아침이 되어 다른 소대원이 눈을 뜨면 뜰수록 소대원의 수는 줄어들고 있었다. 하루하루 지남에 따라 한 명 줄고 두 명 줄고… 결국 영국군과 싸우기 전에 그 소대는 사라졌다.(...)
  • 영국해군 무장 어선과의 1:1 대결
    이탈리아군 잠수함 갈릴레이(Galilei)호는 무장상선도 아닌, 영국 해군의 트롤어선 개조 무장어선과 의 1:1 승부에서 패하고 심지어 나포까지 당했다. 어선 주제에 정면으로 싸움을 걸어 변변한 조준기도 없는데 차례차례 명중탄을 퍼붓고 승리한 영국 해군도 굉장하지만 이탈리아 해군은 장교들이 다쳤다고 시원하게 백기를 걸고 항복해버렸다.(...)

    실제로는 그냥 무장어선이 아니라 대잠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있던 어선이었다. 폭뢰 공격을 견디다 못한 이탈리아 잠수함 쪽이 부상해서 양측이 가지고 있던 함포로 함포전을 벌인 것. 하지만 교전 중에 함장 포함, 4명의 사관을 비롯해 총 16명이 교전 중 전사한데다가 그 직후 영국 해군의 구축함이 왔기 때문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 이탈리아의 전쟁학
    • 이길 수 없는 상대 = 절대 전쟁까지 가지않는다.
    • 강적 및 동격의 상대 = 약해지기를 신중하게 기다리고 나서 개전 → 하지만 참패
    • 약한 상대 = 기꺼이 개전 → 하지만 왜인지 참패
    • 절대 지리라 생각할 수 없는 상대 = 기꺼이 개전 → 고전을 면치 못한다.
  • 전쟁 준비보다 외화
    피아트사에서 개발한 G50 전투기는 1940년 6월부터 제51전투비행단 21, 22비행대대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국에도 배치가 안 끝난 최신 전투기 G50은 이미 1940년 1월부터 핀란드에 수출되기 시작했고(…), 그해 9월 개발된 최신개량형 G50bis는 1941년 1월 핀란드 공군에 판매되었다.(…)
  • 이탈리아군이 미군의 공세를 막았다?
    이탈리아 전선에 서 벌어진 일이다. 미군이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했지만, 패전이 기정사실화된 이탈리아군은 전의를 상실했고 미군도 그걸 눈치채곤 어영부영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독일군 정찰기가 지나갈 때는 제대로 싸우는 척했다. 왜냐? 독일군이 오면 전쟁이 더 길어지므로 미군에 발포한 것이다. 당연히 미군도 눈가리고 아웅했는데, 그 전투을 목격한 정찰기는 이렇게 보고 있었다.
    "대단해! 이탈리아군이 미군의 공세를 막고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의 바람과는 달리 독일군의 원군이 왔고, 전투는 진짜 격전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 신의 가호
    이탈리아군은 적절한 보관 장소가 없을 경우 교회에 화약을 즐겨 보관했다. 교회라면 적군도 폭격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신의 가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몬테카시노 전투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실제로 교회나 수도원에 대한 공격을 주저한 사례가 종종 있긴 했다.
    그러나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느 날, 교회의 첨탑에 보기좋게 낙뢰가 떨어져 대폭발이 일어나 순식간에 마을의 1/5이 날아갔다고 한다.(…)
  • 나폴리의 도둑은 세계제일
    2차대전 때 이탈리아 나폴리에서는 군함이 도둑맞은 사례(…)가 있었고, 중동전쟁의 한창 때는 전차까지 도둑맞았다고 한다.
  • 군용기에 관한 일화
    이탈리아 공군은 2차대전 때까지도 계기비행 훈련을 전혀 하지 않았다. 어느 전투기의 초기형은 조종석을 밀폐식으로 만들었지만 조종사들이 "바람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자 양산형은 개방식으로 되돌렸다. 그 때문에 모처럼 만든 고속 전투기가 엉망.
    참고로 1차대전 때만 해도 모든 비행사들은 당연히 손이나 도구를 사용해서 바람을 직접 몸으로 느껴가면서 풍향과 풍속을 계측해 비행했다. 저 바람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은 딱히 뽀대가 아니라 그냥 시대에 좀 뒤떨어진 것뿐이다(…).
  • 무기없이 싸울때 이탈리아군은 강하다(?)
    소 말리아에 UN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을 때, 약간의 시비로 미 해병대와 이탈리아군 사이에 패싸움이 일어났다. 사건의 단초는 이탈리아군이 검문에서 통과시킨 소말리아인 용의자를 미 해병대가 연행하려고 하자 이탈리아군과 미 해병대간의 언쟁이 일어났고 이 틈을 본 소말리아인 용의자는 도망, 그것을 본 미 해병대원이 그 소말리아인을 사살해 이를 계기로 패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양군 장교들이 이 패싸움을 수습했을 때에는 이탈리아군이 미국 해병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 머리회전이 빠른 이탈리아군
    북 아프리카에서 독일군이 영국의 패잔병 사냥을 하고 있었지만 영국군은 원주민 마을에 교묘하게 숨어들어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다. 독일군도 원주민 마을을 샅샅히 수색했지만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현지의 세력가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영국군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면 설탕 5포대와 밀가루 5포대를 주겠다."
    다음날, 영국군은 전원 잡혔다.
  • 상대의 발을 멈추기 위해 대연회
    통일전쟁시 가리발디가 로마 해방을 위해 진군했을 때의 일화.
    이 탈리아 통일전쟁시 이탈리아의 절반을 가리발디의 의용군이 해방하고, 로마 해방이 눈앞에 보이자, 가리발디가 자신들의 사업에 영향을 준다고 판단한 이탈리아의 세력가들과 마피아는 가리발디의 침공을 늦추기 위해서 계책을 궁리했다. 가리발디와 그의 의용군을 초대하는 대연회(…)를 개최했던 것이다. 훈제 햄으로 시작된 코스요리는 메시나풍 생선 요리, 사슴고기, 어린 양 통구이, 닭 요리 등등 디저트에 도넛이나 구운 사과에 이르기까지 총 12 접시가 나올 정도로 매우 호화로웠고, 게다가 1주일이나 계속되었다. 여기에 눈이 멀어 발이 묶여버린(…) 가리발디는 정부군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고 고전, 결국 협상할 수밖에 없었다.
  • 와인
    대전기 이탈리아군이 보급한 와인의 표지엔 "전투중 단숨에 들이키면 만취되어 전투도 두렵지 않다!"라고 써있었다. 또 물자비축량은 탄약보다 와인이 많았다.(...)
    하지만 이건 변명의 여지가 있는게, 유럽의 고질적인 수질문제로 물 대신 와인이나 맥주를 식수로 음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연합군측도 마찬가지였고 현재 유럽의 여러 군대도 마찬가지다.
  • 포로가 된 이탈리아군
    오 스트레일리아에 독일, 일본, 이탈리아 3개국의 포로가 수용된 수용소가 있었다. 독일군 포로들은 집단을 이뤄 땅굴을 파서 수용소에서 탈주하려고 시도했고 일본군 포로들은 집단으로 자결해버렸다. 하지만 이탈리아군 포로들은 수용소의 문이 필요없을 정도로 점잖았고 개중엔 근처의 아가씨까지 애인으로 만든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어떤 수용소에서는 오페라도 보여줬다고 한다(…).
  • 사막에서 구원 요청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과 싸울때, 이탈리아군 부대로부터 구원요청이 들어오자 독일군은 전력을 다해 그들을 구원하러 향했다. 그러나 바로 그 이탈리아군은 사막에서 귀중한 물을 사용해 파스타를 데치고 있었다.
  • 음식이라면 역시 이탈리아
    "전장에서도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없을까."라는 그 일념하에 이탈리아인에 의해 동결건조 기법이 발명되었다. 연합군측도 매우 놀랐다고 한다.
  • 이탈리아군에게 잡힌 연합군 병사들의 생활
    이탈리아 근처에 있는 몰타섬에서 출격해 작전을 하던 한 영국 공군(RAF) 조종사가 이탈리아에 추락,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날 밤 와인을 비롯해 자신이 있었던 몰타섬 영국기지에서는 꿈에서나 보던 음식들을 대접해주는걸 보고 이제 내일 사형당하는구나...이런게 최후의 만찬이라는 것인가...훗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날, 잠도 잘 자고 죽을 각오도 다진 상태에서 갑자기 이탈리아 통역병과 장교 한 명이 그의 방에 들어왔다.

    조종사는 이제 아...죽는건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장교가 말을 하기 시작했고, 통역병이 영어로 통역했다 그가 말하길...어제는 행정상의 착오로, 장교인 귀관에게 일반병사용 식사를 제공하고 말았다. 나의 명예를 걸고 말하는데, 나는 귀관을 제네바 협약에 따라 정중하게 대접할 것이다. 내 얼굴을 봐서라도 어제의 무례를 용서해 주지 않겠는가?(…)
등등, 원 출처를 찾아보면 이외에도 더 많은 양이 있다.

하지만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는 등, 이건 졸전 기록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키는 모든 나라가 보고 배워야 될 부분이라는 얘기도 있다.

2.10 한국군과 대면한 이탈리아군

1994년 소말리아의 내전으로 민간인이 학살당하자 UN에서 평화유지군을 보냈다. 대한민국은 전투병이 아닌 건설공병대대[3]를 파견했는데, 이탈리아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한국군 약 60명의 공병대, 지원무장 81mm 박격포[4]
이탈리아군 1개 대대병력.망구스타 공격헬기 지원가능.

처음 이탈리아군은 한국의 비전투부대에게 박격포는 왜 가져왔냐고 비웃으면서 우리는 공격헬기까지 보유했으니 걱정말라고 안심시킨다.

얼마뒤

소말리아 민병대가 기지를 습격하자 이탈리아군은 공격헬기에게 지원요청하는 것도 까먹은 채 기지에 한국군만 달랑 남겨놓고 이탈리아 대대병력 전원 철수.

기지에 남겨진 한국군은 소수의 특전사 경호병력을 제외하면 대다수가 비전투 공병부대원에다 부실한 무장이었지만, 가볍게 소말리아 민병대 격파.

3 평가

이탈리아군이 이러니, 어느 사람이 말하길 전 세계의 모든 군대가 이탈리아군만 같으면 세계평화가 올 것이다라고 했을 정도다(…). 오죽하면 가장 이상적인 전쟁의 요소중 하나가 이탈리아 적군이다. 나머지 요소는 독일의 무기, 소련의 겨울 군장, 영국의 여름 군장, 미국의 식량, 프랑스 위문단. 어떤 글에 따르면, 이건 당시 이탈리아의 동맹국독일인들의 평가였다.(...)

아무튼, 이 글이 객관적이라고 하기에는 좀 곤란하다. 이런 식으로 편집된 자료만 가지고는 미군도 쓸데없이 비대한 비효율적 군대로 만들 수 있으니까 말이다.

예 를 들자면,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의 배급은 장교와 사병의 차별이 아주 극심하여 북아프리카에서 근무한 어떤 이탈리아 사병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실컷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모래먼지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인데 반해 장교들의 식사는...글에 나오는 그것과 비슷하다(…).

위의 내용 중 사막에서 파스타를 삶아먹는 이탈리아군 이야기의 경우, 그 파스타는 짬밥의 개념으로 보급된 파스타이 다. 우리가 식당에서 먹는 그 멋들어진 파스타가 아니고, 그냥 대충 이것저것 넣은 잡탕으로 해먹었다는 것이다. 사막에서 식당처럼 삶고 난 뒤 물을 버리고 소스에 버무려 먹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넌센스. 그리고 보급품으로 파스타가 나온 이상 물이 부족하건 어쨌건 파스타를 삶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게다가 파스타 따위의 사치품이 이탈리아 병사들에게 보급된적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이탈리아 병사들은 독일군처럼 맛대가리없는 통조림을 까먹으면서 지냈다. 영국군은 그것도 맛있게 먹을듯

물 론 파스타를 삶은 사병이 아니라 삶아 먹어야하는 파스타를 사막에 보급품이라고 갖다준 이탈리아군 상층부는 까도 된다. 이탈리아군의 문제는 흔히 비웃는대로 개개의 사병이 형편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상층부가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왠지 이탈리아는 개개의 부대들은 괜찮은 부대도 많은데 군대 전체로는 엉망이고 중소기업은 세계최고 수준인데 대기업은 안 되는 등 대규모 조직의 운영은 뭔가 잘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냥 통일 안 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롬멜도 이 문제를 전반적으로 깐 적이 있다(...) 그런데 이건 개개인과 장교들은 엘리트인데 지휘부가 개병신인 나치 독일을 보는 것 같다

출처 https://mirror.enha.kr/wiki/%EC%9D%B4%ED%83%88%EB%A6%AC%EC%95%84%EA%B5%B0%EC%9D%98%20%EC%A1%B8%EC%A0%84%20%EA%B8%B0%EB%A1%9D